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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나니 상단 후계자의 황금 독점1화

망나니 상단 후계자의 황금 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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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숫자 아래 묻힌 금

눈을 뜨자마자 머리 안쪽이 깨지는 듯 아팠다.

윤태윤은 신음하며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익숙한 스마트폰이 아니라 차가운 은제 잔이었다. 잔 안에는 식은 술과 검붉은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들보 사이로 푸른빛이 번졌다. 창문에는 유리가 없고 얇은 천이 바람에 흔들렸다.

낯선 방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손목이 가늘었다. 손등에는 물류센터에서 상자를 옮기며 생긴 굳은살 대신 반지 자국과 작은 흉터만 있었다.

탁자 위 거울을 보자 낯선 남자가 함께 일어났다. 검은 머리칼이 눈썹까지 내려왔고 금갈색 눈이 창백한 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누구야…….”

목소리마저 달랐다.

그 순간 머리 뒤에서 깨진 유리처럼 기억이 번쩍였다. 마차 바퀴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 비싼 술병. 누군가가 부르는 이름.

레온.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대신 몸이 무엇을 아는지 손이 책상 서랍을 찾아냈다.

첫 번째 서랍에는 금화 세 닢과 은화 몇 개가 있었다. 두 번째 서랍에는 접힌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에르딘 제국력 417년 늦봄. 하렌 상단 본점 및 부속 창고. 채권단 공동 압류 예정일, 사흘 후.’

태윤은 종이를 두 번 읽었다.

배송 경로를 확인하던 중 사고가 났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브레이크가 울리고 차체가 기울었다. 그다음은 없다.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에는 낯선 세계의 방과 압류 예고장이 있었다.

놀랄 시간은 길지 않았다. 태윤은 책상 위를 훑었다. 사냥용 검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고 의자에 걸린 외투에서는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술집 영수증과 마차 대여증은 한데 뒤엉켜 있었다.

좋지 않은 생활이었다. 파산 직전 상단 후계자가 만들 법한 생활이었다.

그는 서랍을 모두 열었다. 현금은 금화 세 닢. 당장 필요한 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태윤은 침대 옆 끈을 당겼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장부를 가져와. 현금 잔액도.”

문밖 사람이 숨을 삼켰다.

“술값을 더 치르시려는 겁니까?”

“확인하려는 거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방금 깨어난 사람이 이미 의심받고 있었다.

잠시 뒤 밤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장부 세 권과 봉인 서류를 안고 들어왔다. 잿빛 눈은 지쳐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마리안 벨로아입니다. 수석 회계사로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새 빚을 만들 생각이라면 서명부터 받지 마십시오.”

그녀가 장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레온 하렌이다. 맞나?”

마리안의 눈썹이 올라갔다.

“본인이 본인 이름을 확인하시는군요.”

“머리가 좋지 않다. 필요한 것만 묻겠다. 압류까지 사흘이라는 건 본점과 창고가 모두 넘어간다는 뜻인가?”

“채권단이 공동 봉인하고 매각 절차에 들어갑니다. 아버님이 자리를 비운 뒤 상단을 대신 맡으셨으니 책임은 장남에게 먼저 돌아옵니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다는 말에 젖은 망토와 어두운 항구의 냄새가 스쳤다. 장소와 날짜는 떠오르지 않았다.

“현금.”

“금화 스물한 닢입니다.”

“내 서랍에는 세 닢이 있었다.”

“본점 금고까지 합친 금액입니다. 열두 닢은 오늘 운송대에 지급할 선급금입니다.”

“그럼 쓸 수 있는 돈은 아홉 닢. 급료는?”

“하루 반치입니다.”

마리안은 장부의 다른 줄을 짚었다.

“채권은 네 건입니다. 북문 금융조합 원금 백팔십 금화. 루미엔 마차길드 운송 대금 쉰두 금화. 동부 창고주 임대료 서른 금화. 전매국 납품 보증금 마흔 금화.”

태윤은 숫자를 머릿속에 배열했다. 현금 스물한 닢. 채무 삼백이 넘었다. 팔 수 있는 건 재고뿐이었다.

“재고 목록.”

“이미 처분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마리안이 봉인 서류를 내밀었다. 붉은 왁스에는 하렌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잔향석 삼백스무 상자와 기타 광물을 헐값에 넘기라는 내용이었다.

“누구에게?”

“발테르 하렌 숙부님이 지정한 중개상입니다. 오늘 정오까지 수락하지 않으면 채권단에 재고 목록을 넘긴다고 했습니다.”

“단가는?”

“장부상 매입가의 절반입니다.”

“잔향석이 그렇게 쓸모없는 물건인가?”

“출력이 약하고 파장이 불안정합니다. 전매국 감정소도 불량 마도석으로 분류했습니다. 상단에 쌓인 지 두 해가 넘었습니다.”

말은 정확했다. 그러나 태윤은 재고를 줄이기 위해 손실을 확정하던 사람들을 기억했다. 쓸모없다는 판정은 물건의 본질보다 판로가 없다는 뜻일 때가 많았다.

“처분 명령 원본을 보여 줘.”

“보여 드렸습니다.”

“원본과 장부의 재고 위치가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마리안은 그를 고장 난 기계처럼 살폈다.

“도련님께서 장부를 읽으실 줄 알았습니까?”

“읽는 사람은 아니었나 보지.”

“지난달에는 한 줄도 끝까지 읽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오늘은 끝까지 읽겠다.”

“새로 사치품을 들이거나 도박 빚을 만들 생각이라면 그 전에 상단 사람들을 내보내십시오. 남은 돈으로 한 사람분이라도 급료를 지켜야 합니다.”

태윤은 그녀가 자신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직원들을 먼저 계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재고를 확인하면 도박으로 보이나?”

“도련님이 무엇을 하든 지금까지는 결과가 그랬습니다.”

반박할 근거는 없었다.

“창고 열쇠를 가져와.”

“창고장에게 직접 말씀하시죠. 저는 처분 승인서의 시효를 확인해야 합니다.”

마리안이 돌아서려는 순간 복도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울렸다.

문 앞에 큰 체격의 사내가 서 있었다. 왼쪽 뺨에 긴 흉터가 있었고 작업복에는 기름과 먼지가 묻어 있었다. 손에는 철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로웬 브릭. 창고장입니다.”

그는 레온을 위아래로 훑었다.

“처분하실 거면 빨리 하시죠. 인부들까지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잔향석을 직접 보겠다.”

“도련님이요?”

“문제 있나?”

“상자를 옮기는 건 사람을 부르면 됩니다. 도망칠 때 마차를 고르는 일은 도련님이 잘하시겠죠.”

마리안이 낮게 불렀다.

“로웬.”

“틀린 말은 아니잖습니까.”

태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믿음을 얻으려면 검증부터 받아야 했다.

“좋아. 네가 앞장서.”

지하 창고의 공기는 눅눅했다. 습기와 쇠 냄새 사이로 돌가루 냄새가 났다. 벽면의 마력등은 반쯤 꺼져 있었고 인부 둘이 상자 위에서 급히 일어났다.

가장 안쪽 쇠문을 열자 같은 크기의 나무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상자마다 숫자가 있었지만 최근에 덧칠한 흔적이 제각각이었다.

레온은 가까운 상자를 열었다. 회색 광물 조각들이 천으로 감싸여 있었다. 값싼 돌처럼 보였다.

하나를 집어 손바닥에 올리자 미약한 떨림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금방 사라지지 않고 길게 남았다.

“이게 불량이라고?”

“마력 출력은 낮습니다.” 로웬이 말했다. “불을 밝히는 등에도 못 씁니다.”

레온은 돌을 귀 가까이 가져갔다. 소리는 없었다. 손끝의 진동만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되었다.

“마리안. 한 상자에 몇 개라고 적혀 있지?”

“이백 개입니다.”

“열어 본 상자들의 실제 수량은?”

“밀봉 재고라 세어 보지 않았습니다.”

“표본 열두 상자만 따로 빼자.”

“전량 처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량 처분하면 손실이 확정된다.”

“손실이 아니라 급료를 마련하는 겁니다.”

마리안의 말이 창고에 울렸다. 그녀의 말은 맞았다. 돌에 가능성이 있어도 내일 사람에게 줄 돈이 없으면 상단은 끝난다.

레온은 상자를 열어 광물을 세기 시작했다. 열두 상자의 무게와 개수가 조금씩 달랐다. 기록과 실제 수량이 크게 벌어진 상자도 있었다.

“보관 손실이 크군.”

“습기를 먹은 겁니다. 북부에서 가져온 물건이라 본래 그렇습니다.”

“모두 같은 정도로?”

로웬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온은 상자 뚜껑 안쪽을 살폈다. 북쪽 산지의 이름으로 보이는 표식 아래에 검은 선이 새로 그어져 있었다. 누군가 재고 위치를 표시한 흔적 같았다.

“이 선은 누가 그었지?”

“창고 인부들은 모릅니다.”

“도련님.” 마리안이 끼어들었다. “정오까지 처분 승인서를 보내야 합니다.”

그때 지상에서 정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뒤 젊은 인부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중개상들이 왔습니다. 발테르 하렌의 확인서를 들고요. 오늘 안에 물건을 싣겠다며 마차까지 대기시켰습니다.”

로웬의 턱이 굳었다.

마리안이 레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승인서에 서명하십시오. 적어도 급료 하루치는 마련됩니다.”

레온은 손에 든 잔향석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의 진동은 오래 사라지지 않았다.

“얼마에 넘기지?”

“장부 매입가의 절반입니다. 운송비는 중개상이 부담합니다.”

“그럼 저들은 돌을 가져가도 이익이 남는다고 판단한 거군.”

“중개상은 손실을 감수하고 사는 겁니다.”

“그런 거래를 하는 사람은 손실을 감수하지 않아.”

레온은 처분 확인서를 펼쳤다. 황실 전매국 운송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런데 매입 계약 번호 칸만 비어 있었다. 발행일도 처분 승인일과 맞지 않았다.

“이건 정식 매입 계약이 아니다.”

“그래도 도장이 있습니다.”

“도장과 계약은 다르다.”

마리안은 처음으로 서류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거부하면 채권단이 바로 봉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봉인하게 둬.”

로웬이 헛웃음을 흘렸다.

“사흘 뒤가 아니라 오늘 끝내자는 겁니까?”

“아니. 오늘은 물건을 넘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레온은 표본 열두 상자를 가리켰다.

“이건 별도 봉인한다. 나머지는 위치와 수량을 다시 기록해. 내 서명 없이는 손대지 못하게 해.”

“도련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마리안의 질문은 차가웠다. 이번에는 비웃음이 아니라 서명을 요구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책임지겠다. 대신 장부 원본과 처분 명령의 발행 경로를 오늘 안에 확인해.”

“저 혼자 하라는 말씀입니까?”

“나도 같이 본다.”

마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로웬은 인부들에게 손짓해 표본 상자를 옮겼다.

레온은 마지막 상자의 바닥을 들어 올리다 멈췄다. 나무판 안쪽에 세 개의 짧은 선과 하나의 긴 선이 새겨져 있었다. 정확한 간격은 우연한 흠집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표식을 본 순간 마차 바퀴 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겹쳤다. 뜻은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이 표식을 전에 본 적 있다는 감각만 남았다.

레온은 손가락으로 나무판을 덮었다.

“마리안.”

“예.”

“잔향석을 살 사람을 찾아야 한다.”

“어디서 찾으실 겁니까?”

“먼저 이 돌이 정말 불량품인지 확인한다. 그다음에 누가 절반 가격으로 가져가려는지 알아낸다.”

지상에서 중개상들이 문을 두드렸다. 로웬이 쇠문을 닫자 소리가 두꺼운 벽 너머로 낮아졌다.

사흘 안에 빚을 갚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오늘 자기 손으로 금을 버리는 일은 막았다.

레온은 표식 위에 손을 얹었다. 미약한 진동이 손바닥을 두드렸다.

숫자는 아직 그에게 불리했다. 하지만 숫자 아래 묻힌 물건까지 죽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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