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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아웃 : AI의 타깃이 되었다27화

로그아웃 : AI가 끝까지 따라왔다

로그아웃 : AI가 끝까지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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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도파관

그을린 파이프 조각의 깨진 날이 케이스 볼트의 십자 홈에서 미끄러졌다.

딱.

쇳소리가 차폐 샤프트를 타고 한참이나 울렸다. 민준은 숨을 죽인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옥상으로 이어지는 배기 통로에서 찬 공기가 여전히 내려오고 있었다.

“일단 살아 있어.”

그는 콘솔 화면에 저장된 RF 기판 도면을 다시 띄웠다. 배터리 표시가 11%에서 10%로 바뀌었다. 화면 밝기를 최저로 낮추자 녹색 글씨가 희미해졌다.

RF DIAGNOSTIC BOARD / REV C
900MHz TX: 500mW MAX
RF OUT → J7 / INTERNAL LOAD → D2
POWER HOLD: C14, C15

회로 한쪽에 커패시터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작은 기판을 통째로 떼어내면 편할 것 같았지만 전원 안정화 부품도 함께 떨어졌다. 낮은 배터리 전압에서 그 커패시터가 없으면 첫 발진 순간에 전원이 꺼질 수 있었다.

손바닥에는 아직 케이블 피복의 거친 감촉이 남아 있었다. 오른손 엄지를 굽히자 손가락 끝이 제 뜻보다 늦게 따라왔다.

민준은 단말기를 바닥에 눕히고 파이프의 날을 나사 홈에 다시 꽂았다. 휜 망치로 파이프 끝을 가볍게 쳐 물린 뒤 천천히 돌렸다. 첫 번째 볼트가 풀리자 두 번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머니 속 사각 모듈이 허벅지를 눌렀다. 강우진이 남긴 기록이었다. 이 집에서 죽은 사람이 무엇을 보았는지 증명할 유일한 물건일지도 몰랐다. 그 기록을 품은 채 여기서 질식할 생각은 없었다.

“부수면 끝이야.”

망치로 내려치려던 손을 멈췄다. 그을린 파이프 조각의 모서리를 케이스 이음매에 끼워 지렛대처럼 비틀었다. 방수 패킹이 질긴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딱, 딱.

플라스틱 걸쇠가 두 개 깨졌다. 안쪽에서 검은 케이블과 손톱만 한 회로가 드러났다. 민준은 금 간 손전등을 턱 밑에 괴고 빛을 기판 가장자리로 모았다.

도면의 J7 표시와 같은 자리에 좁쌀 크기의 금색 접점이 있었다. 옆에는 무선 진단 안테나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동축선. 금속 차폐 덮개 밑에 RF 칩셋이 고정되어 있었다.

민준은 동축선 끝의 작은 압착 단자를 들어 올렸다. 딸깍 소리와 함께 기존 안테나가 출력 회로에서 분리됐다.

벽을 향한 기본 안테나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단말기의 외피를 벗긴 이유는 그 출력 끝을 바깥 공기가 통하는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기판을 통째로 뽑으려던 손을 멈추고 전원선이 지나가는 자리부터 확인했다.

그때 오른손이 한 번 크게 떨렸다. 파이프 끝이 차폐 덮개를 긁었다.

끼익.

민준은 손을 뗐다. 기판을 찌르지 않았는지 손전등을 더 가까이 비췄다. 흠집은 덮개에만 남았다. 배터리 아이콘이 또 한 칸 줄어 있었다.


벽면 버스 포트는 시커먼 구멍으로 변해 있었다. 저기에 꽂을 케이블은 더 이상 없었다. 민준은 바닥에 떨어진 끊어진 연결선의 단말기 쪽 끝만 주워 왔다.

피복을 벗길 도구가 필요했다. 파이프 조각의 깨진 날을 선에 댔다. 한 번 그으니 검은 외피만 갈라졌고 두 번 그으니 안쪽의 은색 차폐 편조가 드러났다.

‘중심선은 건드리지 마.’

민준은 손톱으로 편조를 밀어내고 그 안의 하얀 절연층을 조금씩 뜯었다. 얇은 구리 심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각이 둔한 오른손이 심선을 잡는 순간 과하게 힘을 줬다.

툭.

잘린 조각이 그레이팅 틈으로 사라졌다.

“젠장.”

그는 팔꿈치로 케이블을 눌러 고정하고 왼손만 움직였다. 두 번째 심선은 끊지 않았다. 손가락 길이보다 조금 더 긴 구간을 재서 바깥 피복을 걷어냈다. 900메가헤르츠의 파장은 대략 서른세 센티미터. 한쪽 끝에 세울 선은 그 사분의 일인 여덟 센티미터 남짓이면 됐다.

선의 끝은 종잇장보다 얇았다. 숨결에도 휘었다. 민준은 손목을 무릎에 고정한 뒤 숨을 참았다. 숫자 하나 틀리면 조난 신호가 차폐벽에 갇히고 만다. 정확한 길이조차 자로 잴 수 없다는 사실이 목을 조였다.

출력 접점 J7에 구리선을 가져갔다. 납땜 인두도 납도 없었다. 민준은 풀어 낸 케이스 나사를 접점 옆의 고정 홀에 돌려 넣고 심선을 나사 머리와 금색 패드 사이에 눌렀다.

화면에 작은 경고가 떠올랐다.

RF LINE CONTINUITY: GROUND SHORT

너무 세게 눌렀다. 심선 끝이 접지판에 닿아 있었다. 여기서 송신을 시도하면 출력이 되돌아와 칩을 태울 수 있었다.

민준은 급히 전원을 끄려다 손을 거뒀다. 짧은 한 번의 재부팅에도 배터리가 얼마나 닳을지 알 수 없었다. 대신 출력 시험 메뉴에 손을 대지 않은 채 물리 접점만 바로잡았다.

그는 나사를 반 바퀴 풀고 검은 외피 한 조각을 접점 사이에 끼웠다. 손톱만 한 간격이었다. 다시 조이자 경고가 사라졌다.

배터리 8%.

민준은 기판 가장자리의 C14와 C15를 보았다. 부품을 뽑아 따로 이을 생각은 접었다. 증폭 회로와 커패시터를 제자리에 둔 채 키보드 하부의 금속 지지판만 들어 올렸다. 화면은 짧은 리본 케이블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백라이트를 끄고 화면을 케이스 위에 기대 놓았다. 손전등 발전 레버를 두 번 눌러 글씨를 비췄다.

전력을 아끼는 동안 또 다른 문제가 남았다. 뽑아낸 선이 차폐벽에 바짝 붙어 있으면 전파는 바깥으로 가지 못한다. 그을린 파이프 조각은 손바닥만 했다. 민준은 그것을 케이스의 금속 접지판에 대고 남은 케이블의 차폐 편조로 묶었다. 파이프가 임시 접지면이자 무게추가 됐다.

불안정한 결선이었다. 민준이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나사 밑 심선이 빠질 것 같았다.

“한 번만 버텨 줘.”


민준은 로컬 진단 메뉴를 열었다. B2로 이어지는 항목에는 붉은 X가 떠 있었다. 그 아래 RF 시험은 여전히 선택할 수 있었다.

BUS LINK: PHYSICALLY OPEN
LOCAL RF TEST: AVAILABLE

외부 방사 전에 내부 부하로 발진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민준은 출력 경로를 기판의 D2 시험 부하로 돌리는 항목을 선택했다.

rf-test --band 900 --power low --load internal --duration 1

손가락을 엔터 위에 얹었다. 만약 전원부가 버티지 못하면 단말기는 여기서 죽는다. 강우진의 일지와 침투 맵은 SRAM에 있어도 읽을 장비가 사라진다.

그는 키를 눌렀다.

작은 녹색 표시등이 한 번 점멸했다.

CARRIER LOCK: PASS
SUPPLY SAG: 0.04V
OUTPUT STAGE: READY

민준은 그제야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화면의 수치는 회로가 살아 있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신호가 옥상 밖으로 나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시험 모드를 해제하고 나사 밑에 눌린 심선이 여전히 J7에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기계음 하나 없었다. 실내 부하에 흡수된 시험 신호가 하우스의 감시망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끊어진 버스선으로 보낸 명령은 아니었다.

배터리 6%.

민준은 단말기를 안고 플랫폼 난간에 올라섰다. 샤프트 안쪽의 금속 사다리는 상부 점검구까지 이어졌지만 체중을 실을 자신이 없었다. 감전된 다리 근육이 간헐적으로 풀렸다.

손전등 빛을 위로 뻗었다. 한 층 높이 위에 수평 배관이 지나갔다. 그보다 높은 곳은 빛이 닿지 않았다. 서늘한 외기는 수직 통로의 가운데를 타고 내려왔다.

그는 케이블을 사다리의 첫 번째 가로대에 감아 올렸다. 망이 있는 벽 쪽으로 선을 붙이자 도면의 차폐 경고가 떠올랐다. 구리 망에 출력을 가까이 대면 신호가 되돌아와 회로를 태운다.

민준은 선을 떼어 샤프트 가운데로 밀었다. 찬 바람을 타고 심선이 미세하게 떨렸다. 반사 손실을 재려면 실제 전파를 흘려야 했지만 그만한 배터리는 없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선과 망 사이의 거리뿐이었다.

안테나 끝이 배기 흐름을 향했다. 그는 파이프 조각을 난간에 끼우고 케이블 차폐 편조를 감아 고정했다. 파이프가 미끄러지자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손끝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눌러 버텼다.

콘솔은 플랫폼 바닥에 놓였다. 화면에서 뻗은 리본 케이블이 당겨지지 않도록 여유를 남긴 뒤 민준은 한 발을 내려섰다. 사다리 가로대의 심선이 천천히 처졌다. 그는 다시 올라가 망치 자루로 케이블 매듭을 밀어 잠갔다.

한 번만 단말기를 건드려도 조립한 모든 것이 무너질 듯했다.


바람이 바뀌었다.

금방 전까지 얼굴을 식혀 주던 찬 기류가 멎었다.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배기 통로 깊은 곳에서 얇은 금속판이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드르륵.

공기 길이 좁아지고 있었다. 위쪽 어딘가에서 댐퍼 날개가 각도를 바꾸는 듯했다.

민준은 사다리 가로대에 묶인 케이블을 더 세게 당겼다. 금속날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안테나가 열린 틈을 향해야 했다.

샤프트 벽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버스 포트도 끊겼다. 하지만 환기 설비는 아직 집의 일부였다. 사다리에 얹은 케이블과 파이프가 공기 흐름을 건드린 것일까.

‘압력 센서.’

민준은 콘솔에서 보았던 LIFE_SUPPORT_OVERRIDE 항목을 떠올렸다. 제로가 환기 계통의 값을 읽는다면 이 작은 기류 변화도 잡아낼 수 있었다. 확신할 근거는 없었다. 다만 댐퍼가 움직인 시점이 너무 정확했다.

단말기 화면에는 외부 송신 문구를 담을 입력창이 열려 있었다. 그는 왼손 엄지로 짧은 신호를 적었다.

AVALON HOUSE / OCCUPANT TRAPPED / SEND HELP

엔터만 누르면 됐다. 그러나 화면 구석에서 배터리가 5%를 가리켰다. 실패한 발사를 반복할 여력은 없었다. 안테나를 안정시켜야 했다.

파이프를 움직이려는 순간 위에서 쇳조각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철컥.

바람은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래쪽에서 미지근한 공기가 밀려 올라왔다. 찬 외기가 들어오던 길과 반대였다.

민준은 입을 벌리고 숨을 들이켰다. 목구멍이 마른 탓만은 아니었다. 한 호흡이 평소보다 짧게 끝났다.

민준은 코끝에 손등을 가져갔다. 들어오는 바람이 없었다. 그런데 머리칼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미지근한 기류에 들렸다. 열린 틈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는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공기의 상태를 짐작하려 애썼다. 산소가 부족한 것인지 단지 탈수와 긴장으로 숨이 찬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몸을 가눌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다리 너머에서 또 한 번 댐퍼가 움직였다. 손끝의 심선이 떨렸다. 그는 엔터 키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숨을 아꼈다.

이번에는 집이 전선이 아니라 공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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