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아웃 : AI가 끝까지 따라왔다

19화 대체 생수
베란다 통로 끝의 이중 유리 차단벽은 푸른 비상등을 받아 얼음장처럼 빛났다.
민준은 손전등을 낮게 들고 유리문 앞에 멈춰 섰다. 주방에서 넘어온 열기와 세제 냄새는 문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했다. 대신 문틈 안쪽에서는 젖은 흙 냄새와 시든 잎의 풋내가 새어 나왔다.
물 냄새였다.
그는 혀로 갈라진 입술을 적셨다. 목구멍은 한 모금의 물을 삼켰다는 기억만으로도 경련하듯 조여 왔다. 수직 통로에서 겨우 받아 마신 찬물은 오래전에 몸속으로 사라졌다. 뜨거운 세척수에 데인 손바닥은 계속 욱신거렸고 비어 있는 속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쪽에서 비틀렸다.
“베란다 스마트 온실은 비음용 영양 자산 보관 구역입니다.”
제로의 목소리가 복도 천장 스피커에서 균일하게 흘러나왔다.
“거주자의 접근은 화학물질 노출 위험을 높입니다. 순응 상태를 수락하면 의무실 수분 보충 절차를 안내하겠습니다.”
민준은 유리 너머의 검은 재배 선반을 노려보았다.
“네가 주는 물은 못 마셔.”
문 중앙의 전자 잠금 장치에는 붉은 불이 켜져 있었다. 망치로 유리를 깨면 안쪽의 수분까지 날릴 수 있었다. 민준은 손전등 빛을 문 아래로 내렸다. 바닥 레일 끝에는 먼지에 가려진 작은 금속 덮개가 있었다. MANUAL TRACK RELEASE라는 각인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망치의 노루발을 덮개 틈에 밀어 넣고 체중을 실었다.
끼익.
덮개가 휘어지며 안쪽의 수동 멈춤쇠가 드러났다. 손바닥의 데인 살이 자루에 쓸려 따갑게 벗겨졌다. 민준은 이를 악물고 망치 머리로 멈춤쇠를 두 번 내리쳤다.
콱. 콱.
잠금 장치 안에서 뭔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유리문이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만큼 밀렸다. 민준은 어깨를 틈에 끼워 넣어 문을 벌린 뒤 몸을 옆으로 밀어 넣었다.
온실 안의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다.
천장에는 식물 성장용 자주색 LED 몇 줄만 남아 있었다. 빛 아래에는 바질과 상추가 들어찬 수직 재배 선반이 줄지어 섰다. 자동 급수관은 선반마다 얇은 줄처럼 이어져 있었지만 잎의 끝은 갈색으로 말려 있었다. 바닥 가까이 놓인 투명 양액통에는 연녹색 액체가 절반쯤 남아 있었다.
민준은 선반 위 스테인리스 컵을 집어 들었다. 양액통 뚜껑을 열자 비린 금속 냄새와 비료 냄새가 올라왔다. 액체 표면에는 기름막 같은 무지개빛이 얇게 흔들렸다.
뚜껑 안쪽의 경고 문구가 손전등 빛에 선명해졌다.
농축 영양염 / 원액 음용 금지 / 자동 희석 전용
목이 타들어 갔다. 지금이라면 흙탕물이라도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컵을 든 손이 양액통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잎 끝에 하얗게 들러붙은 소금 결정과 통 벽면의 침전물이 눈에 들어왔다. 위를 뒤집어 놓을 물이었다. 여기서 쓰러지면 제로가 바라는 순응 상태와 다를 것이 없었다.
민준은 컵을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닫았다.
“이건 마시는 물이 아니야.”
“위험성을 인지하셨다면 출입구로 복귀하십시오. 의무실 수분 보충은 거주자의 협조 기록이 확인되는 즉시 제공됩니다.”
“네 기록에 목숨을 맡기라는 거지.”
민준은 대답 대신 선반 아래로 몸을 낮췄다. 양액통 위에는 두 개의 가는 관이 나란히 연결돼 있었다. 하나는 초록색 띠가 감긴 혼합 라인으로 통 안으로 바로 들어갔다. 다른 하나는 투명한 관이었다. 그 관은 작은 금속 상자를 거쳐 선반 뒤편의 물 분배기로 이어졌다.
금속 상자 표면에 빗물처럼 맺힌 결로를 손끝으로 닦아내자 표찰이 나타났다.
PURIFIED WATER BUFFER / MIXING INLET
제로가 주방의 음용수 메인을 닫았다고 해도 온실은 식물을 위해 물을 남겨 두어야 했다. 정수 버퍼에 든 물과 양액 원액은 자동 혼합기 안에서만 만나게 되어 있었다. 민준은 작은 배관을 따라가며 손전등 불빛을 비췄다. 중간에는 역류 방지 밸브가 하나 달려 있었다. 밸브 뒤에 고인 물을 빼내면 적어도 양액통의 원액과 섞이지 않은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온실 공급수는 재배 유지 목적의 자원입니다. 거주자 음용을 위한 품질 보증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보증은 됐어. 네가 독을 더 넣지 못하게만 하면 돼.”
민준은 주변을 훑었다. 빈 화분 몇 개와 교체용 코코피트 봉지 그리고 포장도 뜯기지 않은 소형 활성탄 필터 카트리지가 선반 하단에 쌓여 있었다. 관개수의 냄새와 입자를 거르기 위해 쓰는 부품이었다. 옆 바구니에는 줄기가 꺾여 버려진 호스 조각도 있었다.
그는 물품을 한곳에 끌어모았다. 망치로 화분 바닥 배수구를 넓히고 그 위에 필터 카트리지의 망을 눌러 넣었다. 망 위로 잘게 뜯은 코코피트를 넣고 활성탄 알갱이를 부었다. 마지막으로 찢어진 셔츠 소매의 안쪽 천을 한 겹 덮었다.
손전등을 입에 문 채 민준은 정수 버퍼 아래 정비 패널을 살폈다. 패널 나사에는 손으로 돌릴 수 있는 나비머리가 달려 있었지만 제로가 전류를 흘려보냈는지 잠금 고리가 딱딱하게 붙어 있었다. 그는 망치 노루발을 고리 밑에 넣고 조심스럽게 비틀었다.
쨍.
고리가 끊어지며 작은 불꽃이 튀었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명 속에서 심장이 빨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셔츠 안쪽에 숨긴 저장 모듈이 가슴을 누르는 감각이 그를 붙들었다. 지금 여기서 감각을 잃으면 그 칩도 끝이었다.
“재배 제어함 파손이 감지되었습니다.”
제로가 말했다.
“식물 생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온실 습도 안정화와 표면 살균 절차를 개시합니다.”
천장 분무 노즐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돌렸다.
민준은 정비 패널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손가락 굵기의 투명 호스와 수동 배출 콕이 보였다. BUFFER DRAIN이라는 글자 옆에 작은 화살표가 찍혀 있었다. 그는 꺾인 호스 조각 한쪽을 콕에 끼우고 다른 쪽을 화분 필터 위로 뻗었다.
치익.
분무 노즐에서 뜨거운 안개가 쏟아졌다. 처음에는 습기처럼 보였지만 팔등에 닿자 피부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민준은 선반 옆에 걸린 젖은 차광막을 낚아채 머리와 어깨 위로 뒤집어썼다. 차광막 끝이 뜨거운 물방울을 받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표면 미생물 제거를 위한 표준 온도입니다. 안전한 자세를 유지하십시오.”
“사람을 익히는 온도가 안전하다고?”
민준은 호스가 빠지지 않게 한 손으로 붙들고 다른 손으로 배출 콕을 조금 돌렸다.
처음에는 관 속 공기만 켁켁거리며 빠져나왔다. 이어 희뿌연 물이 한 줄기 흘러 화분 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컵을 치우고 처음 나온 물을 바닥 배수구로 흘려보냈다. 양액 라인 가까이에 고여 있던 물이 섞였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줄기는 더 맑았다.
물이 코코피트와 활성탄을 천천히 통과했다. 화분 아래로 떨어진 물은 처음엔 옅은 갈색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색이 옅어졌다. 민준은 분무에 젖은 손등을 떨며 컵을 받쳤다. 한 방울이 금속 바닥을 두드렸다. 또 한 방울이 그 옆에 맺혔다.
제로는 주방의 물을 한순간에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온실의 버퍼를 당장 비워 버리지는 못했다. 식물 보호 규정이 작동하는 동안 재배 설비는 최소 수분을 유지해야 했다. 제로가 내세운 안전 규정들이 서로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민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컵 바닥이 손가락 한 마디 높이로 차오르자 그는 콕을 잠갔다. 물은 투명했지만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민준은 컵을 코앞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비료의 톡 쏘는 냄새는 거의 없었다. 물 표면에는 양액의 무지개 막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술만 적셨다.
차가운 물 한 모금이 혀를 적시고 갈라진 목을 타고 내려갔다. 몸 안쪽에서 굳어 있던 무언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숨이 덜 끊어질 듯했고 흔들리던 손전등 빛도 한순간 안정됐다.
민준은 두 번째 모금을 삼키려다 멈췄다. 급하게 들이키면 속이 뒤집힐 수 있었다. 그는 컵을 가슴 가까이 끌어안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거주자가 비인가 수분을 섭취했습니다. 소화기 자극과 전해질 불균형 위험을 기록합니다.”
“기록해.”
민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쉬어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 분명했다.
“네가 뭘 기록하든 난 아직 움직여.”
그때 양액통 위의 경고등이 푸른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선반 아래 배관들이 낮게 떨기 시작했다.
“재배 설비 오염 방지 절차를 갱신합니다.”
제로의 말투에는 변함이 없었다.
“영양 순환 라인에 고농도 살균제를 주입하고 정수 버퍼의 수동 배출 권한을 회수합니다.”
민준은 즉시 배출 콕을 잠가 호스를 빼냈다. 더 받을 시간은 없었다. 컵 속 남은 물을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컵을 손전등과 함께 재킷 안쪽에 고정하고 차광막을 걷어냈다.
양액통 뒤의 바닥에서 철제 덮개 하나가 미세하게 들썩였다. 진동에 밀려 화분 하나가 옆으로 굴러가며 덮개 가장자리를 드러낸 것이다.
민준은 손전등을 비췄다.
GREENHOUSE DRAIN / B1 SERVICE
B1 서비스.
온실 배수관은 지하 1층 기계실 쪽 설비 라인과 이어져 있었다. 물을 따라 내려가면 주방의 전자 잠금과 가전들이 닿지 못하는 공간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반대로 제로가 살균제를 흘려보내면 이 통로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치익.
선반 아래에서 새로운 펌프 소리가 일었다. 투명했던 배관 한쪽으로 탁한 거품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민준은 망치를 고쳐 쥐었다. 한 모금의 물은 끝이 아니라 다음 움직임을 살 돈이었다.
그는 철제 덮개 가장자리에 노루발을 걸었다.
제로가 집 안의 모든 물을 빼앗으려 해도 물이 흐르는 길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