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13화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AD
스폰서 광고

13화: 연무장의 마력 폭주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부터 성황전 제1연무장에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챙! 채채챙!

목검이 허공을 가르고 이어지는 진검의 칼날이 단단한 훈련용 허수아비를 단숨에 베어 넘겼다.

열두 살 소년의 몸통만 한 통나무가 힘없이 두 동강 나며 흙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아…… 하아……."

카시안은 검을 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 끝을 지나 목덜미를 적셨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식을 줄 몰랐다.

어제 중앙 정원 장미 울타리에서 발견했던 검은 섬유.

은제 방울의 문양과 똑같은 세 갈래 매듭이 새겨진 그 실 조각은 분명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누군가의 그림자가 닿아 있다는 명백한 경고였다.

'지켜야 해.'

카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언제나 두통과 광증의 경계에 서 있던 아버지 레오하르트. 그리고 이제 겨우 아장걸음으로 걷기 시작한 작은 동생 에일린.

가족 그림을 품에 쥐고 와서 환하게 웃던 동생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독한 조급함이 목을 죄어 왔다.

황태자라는 이름표는 무거웠고 열두 살의 검은 아직 제국의 어둠을 모두 베어 내기에 너무도 가벼웠다.

"전하, 오늘의 새벽 수련은 이것으로 마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연무장 한편에서 지켜보던 기사장 바르도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마른 수건을 건넸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았습니다. 계속하겠습니다."

"어제 정원 순찰까지 도셨습니다. 지나친 수련은 마력로에 무리를 줍니다. 황실 혈통의 마력은 신체가 지쳤을 때 가장 위험하게 날뛰는 법입니다."

"괜찮습니다."

카시안은 바르도의 말을 단호히 자르며 검을 고쳐 쥐었다.

"적들이 우리 틈을 노릴 때 피로를 핑계로 봐주지는 않습니다. 검을 더 빠르게 휘두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순간이었다.

쿵!

심장 부근에서 무거운 충격이 울렸다.

카시안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붉은 마력이 불길하게 요동치며 맥동했다. 머릿속이 쪼개질 듯한 날카로운 이명이 귓전을 찢었다.

"큭……!"

카시안의 손에서 검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전하?!"

바르도가 놀라 다가서려 했다. 하지만 카시안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검자루를 더 억세게 쥐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러서십시오."

카시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가슴속에서 솟구친 핏빛 불꽃은 이미 소년의 통제를 벗어나 사납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같은 시각 소공녀 궁의 침실은 부드러운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공주님, 오늘은 따뜻한 우유 푸딩도 다 드셨네요."

마리안이 부드러운 천으로 에일린의 입가를 닦아 주며 활짝 웃었다.

"우우! 마마!"

에일린은 침대 위에서 두 팔을 번쩍 들며 통통한 발을 굴렀다.

어제 정원 산책의 여파로 꿀잠을 자고 일어난 덕분인지 컨디션은 최고였다. 아침 식사로 나온 신선한 우유와 달콤한 과일 퓌레를 깨끗이 비워 낸 참이었다.

리세가 곁에서 작은 양말을 신겨 주며 배시시 웃었다.

"공주님께서 어제 황제 폐하께 뽀뽀를 해 주신 덕분에 황궁 분위기가 얼마나 밝아졌는지 몰라요. 아침부터 펠릭스 백작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이셨답니다."

'당연하지. 직장 상사 기분 맞춰 주는 건 사회생활 8년 차의 기본 소양이라고.'

에일린은 속으로 뿌듯하게 웃으며 앙증맞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폭군 아빠 레오하르트는 확실히 다루기 쉬운 딸바보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츤데레 황태자 카시안 역시 어제 가족 그림을 보고 눈이 촉촉해졌으니 앞으로의 황궁 생존기는 꽃길이 보장된 셈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싸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번쩍 스쳐 지나갔다.

쿵.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기묘한 공명이 에일린의 가슴을 울렸다.

'……어?'

공기가 달라졌다.

방 안의 따스한 공기 사이로 날카롭게 갈라진 유리 파편 같은 기운이 섞여 들고 있었다.

에일린의 본능적인 육감. 전생의 눈치와 이 세계에 태어나며 깃든 '정화의 무의식'이 황궁 저편에서 터져 나오는 불길한 진동을 포착했다.

그것은 레오하르트가 한밤중 침전에서 겪었던 끔찍한 발작의 기운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묵직하고 거대한 폭풍과는 달랐다.

훨씬 더 불안정하고 연약한 그릇이 깨져 나가는 듯한 위태로운 파동.

'카시안 오빠……?'

에일린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궁 북쪽 제1연무장 쪽 상공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붉고 검은 마력의 아지랑이가 흉흉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공주님? 왜 그러세요?"

마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에일린을 불렀다.

에일린은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침대 난간을 짚고 일어선 에일린은 짧은 두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탁, 탁, 탁.

아장거리며 침대 아래로 내려온 에일린은 방 문을 향해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 공주님! 혼자 걸어가시면 넘어져요!"

리세가 깜짝 놀라 달려왔지만 에일린은 문고리를 가리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오빠! 오빠아!"

"예? 황태자 전하 말씀이세요?"

"오빠 아파! 앙대, 가!"

에일린의 보라색 눈망울에 어린 다급함은 평소의 귀여운 응석이 아니었다. 마리안과 리세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서늘한 긴장감을 느꼈다.

"공주님, 전하는 지금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실 텐데……."

"가! 오빠한테 가아!"

에일린이 리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발을 동동 굴렀다.

마리안은 에일린이 지난번 황제의 침전 문 앞에서도 이처럼 강한 고집을 부렸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때 에일린의 손길이 황제의 오랜 고통을 멎게 만들지 않았던가.

"리세, 공주님을 안아 올려. 연무장으로 가자!"

마리안의 결단에 리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일린을 품에 안았다.

에일린은 리세의 어깨 너머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연무장을 응시하며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버텨, 오빠. 내가 갈 때까지 제발 버텨!'


"크아아악……!"

제1연무장의 석벽이 굉음과 함께 쩍쩍 갈라졌다.

붉다 못해 검은빛을 띤 마력의 폭풍이 카시안의 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전하! 정신을 차리십시오!"

바르도 기사장이 검을 뽑아 마력의 장벽을 베어 내며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카시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포한 마력 파동이 바르도의 검날을 튕겨 냈다.

콰앙!

"큭!"

제국 굴지의 기사인 바르도마저 세 걸음 뒤로 밀려나며 바닥에 발을 굳게 딛어야 했다.

"모두 물러서라!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바르도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에게 다급히 외쳤다.

연무장 한가운데 무릎을 꿇은 카시안의 상태는 처참했다.

소년의 검은 머리칼이 거친 마력풍에 휘날렸고 붉은 눈동자는 이성을 잃은 채 핏발이 서 있었다.

피부 표면마다 붉은 마력의 실핏줄이 도드라져 터져 나가고 있었다. 바닥에 짚은 두 손에서는 검붉은 불꽃이 스파크처럼 튀었다.

황실 정통 혈족에게 흐르는 몽경 마력의 폭주.

성장기 어린 황족의 마력핵이 감정적 압박과 신체 한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깨어지려 할 때 일어나는 최악의 발작이었다.

"빌어먹을……! 여기서 쓰러질 수는……!"

카시안은 부서질 듯 이를 갈며 피 섞인 신음을 뱉었다.

머릿속에서는 천둥이 치는 것 같았고 온몸의 혈관이 불타는 기름을 들이부은 것처럼 뜨거웠다.

검을 쥐고 일어서려 할수록 폭주하는 마력은 그의 숨통을 더 깊숙이 옥죄었다.

이대로 마력핵이 터져 버리면 목숨을 잃거나 평생 마력을 쓰지 못하는 폐인이 될 터였다.

그때 연무장의 거대한 철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쾅!

"카시안!"

폭풍 같은 살기와 함께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난 이는 레오하르트였다.

집무실에서 이변을 감지하고 마법 이동으로 달려온 황제의 얼굴은 무섭도록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폐하! 전하의 마력핵이 폭주하고 있습니다!"

바르도가 외쳤다.

레오하르트의 적안이 아들의 상태를 훑었다. 황제의 손끝에서 거대한 흑마력이 피어오르며 연무장 전체를 짓누를 듯 팽창했다.

하지만 레오하르트는 아들을 향해 마력을 쏘아 보내지 못했다.

황실 마력 폭주는 외부의 거친 힘으로 억누를 경우 내부의 마력로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다. 스스로 잠재우지 못한다면 남은 방법은 폭주가 끝날 때까지 뇌와 장기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버티는 것뿐이었다.

"카시안, 내 목소리를 들어라! 마력을 흩어 버려라! 억누르려 하지 마라!"

레오하르트가 결계를 치며 포효했다.

그러나 카시안의 귀에는 이미 아무런 소리도 닿지 않았다. 붉은 불꽃이 소년의 상체를 완전히 집어삼키며 폭발 직전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폐하, 위험합니다! 폭심지가 터지면 연무장 전체가 날아갑니다!"

기사들이 방패를 세우며 외쳤다.

레오하르트의 눈에 절망과 분노가 스쳤다. 자신의 핏줄에 깃든 저주가 기어이 어린 아들까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오빠아!"

연무장 입구의 흙먼지를 뚫고 맑고 앙증맞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일린?!"

레오하르트가 경악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안과 리세가 헐레벌떡 연무장 문가에 멈춰 섰고 그 품에서 작은 분홍빛 그림자가 바닥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안 된다, 에일린! 오지 마라!"

레오하르트가 다급히 손을 뻗었다.

성인 기사들조차 튕겨 나가는 살인적인 마력 충격파가 휘몰아치고 있는 곳이었다. 갓 걸음마를 뗀 아기가 다가갔다가는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에일린은 멈추지 않았다.

뒤뚱거리면서도 단단하게 땅을 디딘 에일린은 사납게 몰아치는 붉은 폭풍을 향해 직진했다.

놀랍게도 카시안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사나운 마력의 바람이 에일린의 몸에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부드러운 산들바람으로 흩어졌다.

마치 사나운 맹수가 제 주인의 어린 숨결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듯이.

'저건……!'

레오하르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에일린의 주변으로 투명한 보랏빛 미광이 아지랑이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에일린의 영혼에 새겨진 고대 로엔의 정화이자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치유의 권능이었다.

에일린은 무릎을 꿇은 채 고통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카시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오빠."

카시안이 희미하게 감긴 눈을 떴다.

붉게 물든 시야 속으로 눈부신 은은한 빛과 함께 천사처럼 동그란 얼굴이 보였다.

'……에일린? 왜 네가 여기에…… 위험해…… 도망쳐…….'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에일린은 카시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붉은 불꽃이 튀고 있는 카시안의 손등 위로 자신의 조그맣고 말랑한 두 손을 꼬옥 얹었다.

"오빠, 아파? 갠차나."

따스한 체온이 소년의 차갑게 얼어붙은 손끝을 감쌌다.

"에이링이 와써. 아파 마."

화아아악!

에일린의 작은 손에서 눈부신 은빛과 연보랏빛 파동이 샘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카시안의 혈관을 태우던 광포한 불꽃을 봄날의 따뜻한 비처럼 적셨다.

찢어질 듯 날뛰던 마력의 가시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심장을 옥죄던 끔찍한 압박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카시안의 입에서 억눌린 숨이 터져 나왔다.

머릿속을 울리던 소음이 멈췄다.

혈관을 갉아먹던 핏빛 마력이 얌전한 시냇물처럼 가라앉아 마력핵 속으로 잦아들었다.

연무장을 뒤흔들던 거대한 폭풍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연무장에 감돌던 것은 오직 포근한 봄볕과 향긋한 꽃향기뿐이었다.


정적이 연무장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기사들은 검을 쥔 채 굳어 버렸고 바르도 기사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턱을 벌리고 서 있었다.

카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헤헤 웃고 있는 어린 동생이 있었다.

"오빠, 이제 안 아파?"

에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시안의 소매를 톡톡 건드렸다.

마력을 한 번에 방출한 탓에 에일린의 뺨이 살짝 창백해져 있었지만 동그란 보라색 눈동자만은 여전히 맑고 다정했다.

"너…… 너 어떻게……."

카시안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자신이 무슨 꼴을 당할 뻔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력 폭주로 죽거나 폐인이 되어 황실의 흉물로 버려질 위기였다.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칼날 같은 마력 폭풍 속으로 뛰어든 것은 다름 아닌 이 조그만 아기였다.

자신이 매일 차갑게 굴고 경계하며 밀어내려 했던 수양동생.

"우웅. 오빠 울어?"

에일린이 작은 손을 뻗어 카시안의 뺨에 묻은 땀과 흙을 서투르게 닦아 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카시안의 가슴속에 단단하게 쌓여 있던 얼음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뚝, 뚝.

소년의 붉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에일린의 손등을 적셨다.

"으흑……."

카시안은 참지 못하고 에일린을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부서질까 조심스러우면서도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온 힘을 다해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바보야…… 왜 위험하게 여길 와…… 다치면 어쩌려고……."

카시안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젖어 있었다.

에일린은 당황하지 않고 카시안의 등을 작은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거봐. 직장 사수든 오빠든 진심으로 챙겨 주면 다 넘어오게 되어 있다니까.'

에일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카시안의 품에 폭 안겼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두 아이를 덮었다.

레오하르트였다.

황제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떨고 있는 아들과 지친 딸을 커다란 두 팔로 한꺼번에 감싸 안았다.

"……잘 버텼다, 카시안."

레오하르트의 낮은 목소리에 깊은 안도와 자애가 묻어났다.

"그리고 고맙구나, 에일린."

황제는 딸의 작은 이마에 깊게 입을 맞췄다.

침전에서 자신을 잠재웠던 그 기적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황제는 명백히 확인했다.

에일린은 황실의 저주받은 운명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이 보내 준 유일한 빛이었다.

카시안은 황제의 품 안에서 에일린의 작은 손을 꼬옥 쥐었다.

눈물로 젖은 소년의 눈동자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서늘하고도 맹렬한 결의가 타올랐다.

'내 목숨은 이제 이 아이의 것이다.'

황태자 카시안 드 아스카니아의 심장에 세상에서 가장 지독하고 맹목적인 '동생 바보'의 맹세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