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31화: 로그는 지워지지 않는다
금요일 오전 8시 30분, 서울 역삼동 주식회사 루미너스 501호 대표실.
모니터 세 대에 픽스온의 클라우드 보안 로그와 루미너스의 에스크로 집행 내역이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오기태가 키보드를 두드리자 붉은색 타임라인이 화면을 채웠다.
“찾았습니다.”
오기태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화요일 밤 11시 42분, 픽스온 해외 세일즈팀 공용 드라이브에서 루미너스의 제작 투자 계획서와 지급 보증서 초안이 다운로드되었습니다. 접속된 계정은 아르카 세일즈에 임시 발급된 자문용 서브 계정입니다.”
윤서연이 원본 문서와 아르카가 유출한 문건을 화면에 나란히 띄웠다.
“루미너스가 제출한 원본에는 ‘한성 캐피탈 지급 보증 150억 원 완료, <블랙 아웃> 협찬 선집행금 20억 원 에스크로 예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르카가 바이어들에게 보낸 수정본에서는 ‘확정’이라는 단어가 전부 ‘미정’으로 바뀌어 있어요. 심지어 에스크로 계좌 번호가 적힌 하단 증빙 페이지는 통째로 삭제되었습니다.”
“악의적으로 조작했군요.”
강시우가 차분하게 서류를 넘겼다.
“단순한 시장 분석이 아닙니다. 상대가 처음부터 노린 건 최지환 배우의 교체만이 아니었어요. 배우를 흔들어 시간을 끌고 그사이에 루미너스가 자금력이 부족한 부실 제작사인 것처럼 해외 바이어들에게 각인시키려 한 겁니다.”
윤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픽스온 내부 규정상 비밀유지협약(NDA) 위반이자 명백한 업무방해입니다. 픽스온 콘텐츠계약팀 박지은 매니저에게 감사 로그와 대조표를 이미 전송했습니다. 오전 9시 정각에 픽스온 컴플라이언스 담당자가 참여하는 긴급 회의가 열립니다.”
시우는 대표실 유리창 너머 502호를 바라보았다.
최지환과 유나린은 한이준 감독과 함께 오늘 오후로 예정된 카메라 테스트 대본을 점검하고 있었다. 전날 픽스온의 캐스팅 유지 공식 메일을 확인한 뒤 두 배우의 눈빛에는 한층 더 깊은 신뢰와 몰입이 깃들어 있었다.
시우의 시야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스타메이커 Lv.2: 리스크 대응 및 권리 방어 분석]
- 아르카 세일즈 조작 문서의 법적 취약성: 98%
- 픽스온 컴플라이언스 제재 발동 확률: 95%
- 글로벌 바이어 대상 원본 신뢰도 회복 지표: 최상
- 권장 대응: 조작 로그 원본 공개, 바이어 직접 소명 채널 확보, 자문 권한 즉시 박탈 요구
시우는 상태창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우들은 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회사의 이름표를 지킬 차례입니다.”
오전 9시, 대회의실 모니터에 화상회의 창이 연결되었다.
화면에는 픽스온 콘텐츠계약팀 박지은과 글로벌 법무·컴플라이언스팀 팀장, 그리고 아르카 세일즈 고문 최도식이 나란히 접속해 있었다. 최도식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찻잔을 들고 있었다.
“어제 말씀드렸듯 저희는 해외 바이어들의 현실적인 우려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아시아 주요 플랫폼 바이어 세 곳에서 루미너스의 제작 지속성에 대해 문의가 들어왔거든요. 신생 법인에 텐트폴 오리지널의 30%를 맡기는 것이 과연 안전한가 하는 점이었죠.”
최도식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우가 화면 공유를 요청했다.
“그 문의가 바이어들의 자발적인 우려였습니까 아니면 아르카 세일즈가 보낸 허위 리포트 때문이었습니까?”
화면에 붉은 글씨가 박힌 디지털 포렌식 로그가 펼쳐졌다.
“화요일 심야, 아르카 세일즈의 자문 계정이 픽스온 내부망에서 루미너스의 지급 보증 문서를 무단 반출했습니다. 그리고 수치를 임의로 왜곡한 뒤 수신처에 신성홀딩스 계열 자문사 인력을 포함해 해외 바이어들에게 발송했죠.”
최도식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건 내부 검토용 초안이 기술적 착오로 전달된……”
“착오로 확정 계좌 증빙 페이지만 골라서 삭제합니까?”
시우가 말을 잘랐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서늘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더불어 어제 오후 픽스온에 전달된 90초 캐릭터 소개 영상에 대해 해외 바이어들이 보낸 실제 피드백도 함께 확인했습니다.”
박지은이 즉시 마이크를 켰다.
“네, 컴플라이언스팀에 보고드립니다. 일본 스트리밍 파트너사와 대만 유통사 두 곳 모두 최지환·유나린 배우의 클립을 확인한 뒤 구매 의향을 최고 등급으로 상향했습니다. 바이어들이 제기했던 불안은 아르카 측이 보낸 잘못된 재무 리포트 때문이었으며 소개 영상 확인 후 제작사에 대한 신뢰도가 완벽히 회복되었다는 공식 회신을 받았습니다.”
최도식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건 영상 하나의 반응일 뿐입니다. 실제 제작비 집행 과정에서 유동성 문제가 생기면 픽스온 전체 라인업에 차질이……”
“루미너스의 제작비 30%는 전액 제1금융권 에스크로 계좌에 묶여 있습니다.”
윤서연이 은행 직인이 찍힌 실시간 잔고 증명서와 한성 캐피탈의 연대보증 확약서를 화면에 띄웠다.
“단 1원도 제작 외 용도로 인출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아르카 세일즈는 이 명확한 문서를 보고도 허위 사실을 유포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계약 위반이자 루미너스에 대한 신용 훼손입니다.”
픽스온 컴플라이언스 팀장이 안경을 벗으며 차갑게 말했다.
“최도식 고문님. 픽스온의 자문 파트너십 규정 제7조에 따르면 고의적인 내부 기밀 반출 및 허위 정보 제공 시 즉각적인 자문 계약 해지와 민형사상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르카 측의 해명 자료를 오늘 정오까지 제출하십시오. 소명이 부족할 경우 즉시 계약을 해지하고 법적 절차에 들어가겠습니다.”
최도식은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화면 속 그의 얼굴에서 여유는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오후 2시, 픽스온 본사로부터 공식 공문이 도착했다.
‘아르카 세일즈의 픽스온 글로벌 유통 자문 자격을 잠정 박탈하며 <투명한 그림자>와 관련된 모든 대외 유통 및 세일즈 권한은 픽스온 본사 직속 세일즈팀과 공동 제작사 주식회사 루미너스가 단독 총괄한다.’
공문을 확인한 윤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완벽하게 정리되었습니다. 픽스온 법무팀에서 아르카 세일즈와 최도식 고문에게 공식 경고장과 감사 통보를 발송했다고 합니다.”
오기태가 덧붙였다.
“신성홀딩스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습니다. 구관모 전무 라인에서 아르카를 통해 판을 흔들려던 계획이 완전히 탄로나자 최도식과의 공식적인 선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꼬리 자르기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수순입니다. 구관모는 불리해지면 절대 전면에 나서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 일로 픽스온 내부에서 루미너스의 발언권은 확실해졌습니다.”
단순히 배역을 지킨 것을 넘어 루미너스는 픽스온 텐트폴 오리지널의 30% 지분과 글로벌 세일즈 공동 결정권을 온전히 확보했다. 대형 기획사의 그림자가 닿지 않는 견고한 방파제가 세워진 것이다.
그때 502호 스튜디오 문이 열리고 한이준 감독이 들어왔다.
“대표님, 카메라 테스트 준비 끝났습니다. 배우들 의상과 분장 세팅도 완벽합니다.”
“가시죠. 오늘부터는 오직 작품만 생각하면 됩니다.”
시우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오후 4시, 루미너스 502호 영상 테스트 스튜디오.
조명이 켜지고 4K 시네마 카메라 두 대가 최지환과 유나린을 향해 렌즈를 맞추었다.
최지환은 짙은 회색 코트를 입고 어둠이 깔린 취조실 세트 중앙에 앉아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지 못해 상대의 손짓과 시선, 옷깃의 주름 하나로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프로파일러 윤설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언니를 잃고 유일한 목격자가 된 서은 역의 유나린이 앉아 있었다.
“테스트 씬 넘버 4, 갑니다. 레디…… 액션!”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최지환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유나린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과 거칠어진 손톱 끝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당신은 어제 경찰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공간을 찔렀다.
“언니가 스스로 사라졌다고 했지만 당신 오른손 검지에는 방어흔이 남아 있어요. 문고리를 안쪽에서 잠그려다 긁힌 자국입니다.”
유나린의 호흡이 멎었다. 그녀는 울부짖지 않았다. 다만 떨리는 손을 천천히 감추며 최지환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얼굴도 못 알아보면서…… 손가락 상처 하나로 날 범인 취급하는 건가요?”
“범인이 아니라.”
최지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없는 듯하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누군가를 숨겨 주고 있는 사람의 손입니다.”
유나린의 눈가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지 않고 눈동자 안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절망과 분노, 그리고 마지막 희망이 교차하는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모니터 뒤에서 지켜보던 한이준 감독이 주먹을 꽉 쥐었다.
“컷! 오케이!”
스태프들 사이에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시우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스타메이커 Lv.2: 주연 앙상블 완성도 측정]
- 최지환(윤설) 캐릭터 몰입도: 98% (고유 스킬 '몰입의 경계' 상시 유지)
- 유나린(서은) 감정 전달력: 99% (S급 감정 동화 발동)
- 페어 시너지 효과: +25% 극적 긴장감 상승
- 종합 평가: 글로벌 텐트폴 기준을 압도하는 마스터피스 씬
한이준 감독이 감격에 찬 목소리로 박수를 쳤다.
“완벽합니다. 이 호흡이면 다음 달 초 크랭크인 첫날부터 단 한 컷도 버릴 게 없겠어요.”
최지환이 코트 자락을 정리하며 유나린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린 씨 덕분에 윤설의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지환 오빠가 앞에서 단단하게 버텨 준 덕분이죠.”
두 배우는 서로를 향해 신뢰 어린 눈빛을 보냈다. 외부의 외압과 비열한 공작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연기로 증명해 낸 주연들의 당당한 모습이었다.
같은 시각, 청담동 신성 엔터테인먼트 전략기획본부.
구관모 전무는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픽스온의 아르카 세일즈 퇴출 통보와 함께 루미너스의 30% 공동 제작권 확정 기사가 떠 있었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르카 최도식 고문과의 계약은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픽스온 쪽 해외 세일즈 라인은 완전히 차단되었습니다. 루미너스가 픽스온과 직접 손을 잡으면서 대외적인 신뢰도까지 오히려 올랐다는 평가입니다.”
구관모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차형준이 왜 무너졌는지 이제야 조금 알겠군.”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잔기술로는 흔들리지 않는 놈이다. 판 자체를 틀어쥐고 있어.”
구관모가 창밖의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좋다. 해외 유통이 막혔다면 국내 방송과 광고 시장에서 숨통을 조인다. <블랙 아웃> 첫 방송 날짜에 맞춰 방송사 쪽에 준비해 둔 카드를 꺼내라.”
역삼동 루미너스 501호.
노을이 지는 창가에서 시우는 태블릿의 캘린더를 확인했다.
SBS <블랙 아웃>의 첫 방송이 2주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픽스온 오리지널 <투명한 그림자>의 크랭크인 날짜가 확정되어 있었다.
신우진의 강렬한 형사 변신과 최지환·유나린의 압도적인 미스터리 스릴러. 루미너스가 준비한 두 개의 거대한 축이 동시에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
시우는 모니터에 적힌 배우들의 이름과 일정을 하나씩 매만졌다.
“시작해 봅시다. 진짜 판은 지금부터니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도심 속에서 루미너스의 간판이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